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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중앙당안관, 日전범 이마요시 히토시 中침략 죄행 자백서 개요 공개

2014-08-01 09:19 신화망 편집:왕추우

[신화사 베이징 8월 1일] 30일, 중국 중앙당안관(檔案館, 기록보관소)에서 일본 전범 이마요시 히토시(今吉均)의 중국 침략 자백서 개요를 공개했다.

이마요시 히토시가 1954년 6월 한 서면 자백서에 따르면 그가 1906년 일본 오이타(大分)현에서 태어나 1921년 6월 일본 봉천 자치 지도부에서 임직했고 1943년 위룡강(偽龍江)성 경무청 청장에 임했다.

그가 범했던 중요 죄행은 다음과 같다.

1932년 8월, 항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대원500명과 자위대원800명을 동원했"으며, "창투(昌圖)현 서문 밖 2km 인근에서 애국자 6명을 체포했다", 이들을 모두 수감했고 살해했다. 11월 상순에 창투역 근처에서 일본 경찰에 명령하여 "일본칼로 한 중국농민을 참수했다."

1933년 2월 중순에 량중(亮中)다리 한커우(漢口)지대에서 항일군중 22-23명을 체포했다. 3월 상순에 톈전둥(田振東)사령의 부친 톈왕(田旺)과 참모장 주샤오페이(朱小飛)를 포함한 14명을 "창투현 남쪽의 빈 광장에서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5월에 위열하(僞熱河) 대리공서에서 임직했다. 이기간에 "경무청을 협조해 인민을 구박하고 민정청의 아편생산을 위해 양귀비를 재배 "하며 중국인민을 해쳤다. 1935년 8월, 일본군의 주허(珠河)현 치아숙청 행동에 참가하고 모 마을에서 중국 청년 한명을 체포했다. "논밭에서 그를 참수했다." 그후에 모 마을에서 청년 5명을 체포했고 모두 군도로 죽였다. 일반인 집 "540 채"를 불태워 "3000여명의 주민이 집이 없어졌다."

1943년 "룡강성 캉타이(康泰)에서 교정부도원을 설립"하며 "2100여명의 반만주 항일인사, 그리고 중국 애국자를 교정부도원으로 이송했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1943년 9월, "중국인 한명을 비빌리에 체포했"으며 잔흑한 형벌로 고문했는데 아무 결과도 없음으로 그를 주사하여 죽였다. 후에 그의 시신을 넌강(嫩江)에 버렸다.

1944년 2월 항일의사를 체포했고 "징싱(景星)현에서 두명을 체포했으며 타오난(洮南)현에서 한명을 체포했다"; 6월에 "애국자 42명을 체포했고" 치치하얼(齐齐哈尔)으로 수감했고 그 중 한명이 잔흑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번역/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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