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실크로드, 中韓 고금 연결
(자료 사진)
[신화사 서울 8월 12일] 원나라 시기 화물을 만재한 상선이 중국 연해 항구, 조선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쉴새 없이 드나들며 "해상 실크로드" 3대 항로중의 하나인 "동양항로"를 형성했다. 이 항로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중국과 조선반도, 일본 열도 사이 물질문화 교류의 "대화의 길"이 되어줬다.
백 여 년 동안 중단된 뒤 지난 세기 90년대, 중한 수교와 더불어 이 해상 실크로드가 다시한번 개통되어 양국의 해상 교류가 점점 더 빈번해졌다. 오늘날 이 해상 실크로드는 새로운 역사 기회속에서 날로 활발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으며 중한 양국의 경제무역과 인문교류 역시 전례없이 번창한 시기에 진입했다.
신안고선(新安古船) 번영했던 실크로드를 반영해줬다
강봉용 한국국립목포대학 섬문화연구원 원장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동양항로"는 진나라 시기부터 점차 통항하기 시작했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대량의 비단, 도자기, 향료 등 화물이 닝버(寧波) 또는 펑라이(蓬萊)에서부터 흑산도, 영암, 조선반도 남부 해안을 거쳐 신라 수도 경주까지 연결됐다.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는 닝버 또는 펑라이에서 출발해 흑산도, 영암, 조선반도 서해안을 거쳐 고려 왕조 수도인 경주까지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 무역이 전성기에 달했고 송나라와 고려왕조의 사신,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갔다.
강봉용은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012년부터 1278년 까지 송나라 상인이 해로를 통해 고려로 진입한 횟수가 129회에 달했고 조선반도를 찾은 송나라 상인 규모가 5000여명에 달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1123년 송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닝버에서 출발, 주산군도를 거쳐 개성에 도착한 항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후 조선과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인해 양국 사이의 해로가 막혔고 교류는 주로 육로를 통해 추진됐다. 해양은 왜적들이 제멋대로 약탈하는 지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