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전범 에바토 타케시,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 죽인 뒤 시신까지 먹어
[신화사 선양 9월 4일]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69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중국 랴오닝(遼寧)성 사회과학규획기금판공실에서 신중국의 개조(改造)를 받은 8명의 일본 전범 사료 수집 및 정리, 연구 성과를 발포했다. 신화통신사에서 8월 31일부터 이 8명의 일본 전범들의 구술 실록을 육속 발부하고 있다.
2013년 7월, 랴오닝성 사회과학규획기금판공실에서 조직한 연구 인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이 8명의 일본 전범을 일대일로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이 8명의 전범들 자신이 그때 중국에서 범했던 죄행과 받았던 교육 개조에 대해서 구술했고 중일 우호를 수호하는 아름다운 염원을 토로했다.
에바토타케시(繪鳩毅), 원명은 이시와타리타케시(石渡毅)이다. 1913년 태어나 1941년 입대했으며 일본군 제59사단 제54여단 제111대대 기관총중대 하사관, 군조(軍曹)에 임한 적 있었다. 1945년 8월 무기를 버리고 소련군에 항복해 소련 극동직역으로 압송됐다. 1950년 소련 정부에 의해 중국으로 이송, 푸순(撫順)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가 11956년 제3차례로 관대처리, 석방돼 귀국했다.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 상임위원, 상임위원장 등 직을 역임했다.
다음은 에바토타케시 구술 내용의 일부다.
내가 동원을 받아 군대에 들어간 것은 나가노(長野)현의 한 중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였고 그때의 나이는 28세였다. 사쿠라(佐倉)연대의 신병훈련을 받은 뒤 중국 산둥(山東)성으로 운송돼 침략전쟁에 가담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자리는 육군 군조, 하사관이었다.
내가 산둥성의 숴거좡(索格莊)에서 커다란 전쟁 죄행을 저질렀다. 일본이 전패한 그해의 6월이었다. 대대장의 명령 하에 30명 신병을 대상으로 한 교육 훈련에서 나는 산 사람을 살인훈련의 도구로 사용해 중국 포로 4명을 잇따라 죽이는 죄행을 저질렀다.
포로들 중에 여자 한명이 있었는데 강제로 하사관 한명의 위안부로 징용했다. 숴거좡에서 장기간 주둔하는 과정 중에 식량의 공급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 하사관이 위안부로 징용당한 여자를 살해하고 그녀의 시체를 먹었다고 한다. 그는 혼자서 먹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본부에서 보내온 고기라고 속여 온 중대의 일본인들로 하여금 여자의 고기를 먹게 했다고 한다. 물론 소문이긴 하나 나중에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그 하사관 본인이 이 사실을 인정했다고 들었다.
해방구나 일본 점령구나 팔로군 전사나 보통 중국 민중이나 일본군대는 임의로 그들을 살해할 수 있게 허락 받았다. 강간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실제로 강간과 같은 일은 수없이 발생했었다. 다른 일본군인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중 특히 해방구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간은 평소에도 자주 발생했었다고 할 수 있다.
치안구의 부대에 위안소가 설치돼 있었다. 거기에는 많은 중국인과 한국인 여성들이 징용돼 있었다. 돈을 조금만 지불하면 바로 위안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당시에 너누나도 정상적인 일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국가와 개인들을 포함해서 자기의 부모나 형제, 혹은 국민들을 살해한 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에서 "당신의 적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하지만 이는 인류로서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를 중국 정부와 인민들이 일본 전범들에게 해 주었다.
요컨대 일본 전범을 우대하고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 준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이 기적 때문에 우리와 같은 침략 전쟁의 선두병들이 평화와 양국 우호를 위해 정의로운 전쟁을 벌인 사람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전명)